말이 되지 못한 말 <추희정, 오픈스페이스 배 수석 큐레이터>
실체를 드러내지 않는 검은 그림자가 더 큰 공포를 자아내 듯,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의 위협은 심리적 불안감을 고조시켰다. 시시각각 울리는 긴급재난문자는 확진자의 숫자와 이동 동선을 알리고, 연일 뉴스 헤드라인에 오르는 “집단감염, 대유행, 팬데믹, 확산, 변이”와 같은 단어는 행동반경을 더욱 위축시킨다. 크고 작은 불편들이 생기고, 불편을 넘어 생계를 위협받는 주변인들의 소식이 전해진다. 정지된 일상, 낯선 오늘. 그런데 그 낯선 하루하루가 해를 넘겨 계속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 낯선 오늘을 익숙해진 내일로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또 다른 한편에서 이 낯선 하루는 하나의 사건쯤으로 여겨진다. 의도치 않게 특수를 누리는 사업이 부상하고, 재빠르게 이를 쫓아 불노소득을 취하는 이들도 생겨난다. 예측 불가능한 갑작스런 상황 속에서 위기는 재난이 되기도, 기회가 되기도 한다. 일상에 제동을 거는 이러한 혼란 가운데 개개인이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주도면밀하게 대처하기란 쉽지 않다. 뉴스에 귀를 기울이고 재난문자를 체크하며 마스크를 착용하고 방역지침을 따르는 것이 최선의 방안일 것이다. 사회적 거리두기와 비대면이 일상화 되어가면서 인터넷과 통신에 대한 의존도는 높아져간다. 그렇다면 바이러스의 확산을 막기 위한 지침과 방역 시스템은 안전한 것인가? 언택트 시대 인터넷을 통한 커뮤니케이션, 대면 접촉을 대체하는 인공지능은 긍정적 미래를 제시해 줄 수 있는가? 그 물음에 대한 답 또한 선뜻 내릴 수 없다. 실체를 알 수 없고, 답을 내릴 수 없는 것들 가운데 우리는 또다시 오늘의 일상을 살아간다. 가나다라마바사.
임봉호 작가는 텍스트와 영상, 설치를 통해 의심 없이 받아들여 온 사회적 약속과 현상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해왔다. 기록된 정보는 얼마만큼 신뢰할 수 있는 것인지, 사회 시스템과 제도는 과연 믿을만한 것인지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작업을 해왔다. 이번 전시에서는 코로나19라는 새로운 위협과 함께 찾아온 또 다른 신호체계인 경보음과 알림문자가 제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인지, 또한 비대면과 온라인 세상에서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반복적으로 행해야하는 인증시스템 속에서 과연 나는 무엇으로 존재하는지, 과거 모순이라고 여겼던 것들이 가능해진 시대에 모순의 개념마저 시대착오적인 것은 아닌지 묻는 작업을 선보인다. 시간이 지나면 낯선 것 또한 익숙해지기 마련이지만, “낯선 오늘이 계속 낯설었으면 좋겠다. 익숙해지는 것만이 좋은 것은 아닌 것 같다.”는 임봉호 작가는 낯선 것을 끝까지 낯설게 하는, 결국 익숙해지고야 마는 것들을 다시금 낯설게 만드는 작업을 해오고 있다.
임봉호는 이번 전시의 제목을 “가나다라마바사”라 붙였다. “가나다라마바사”를 되뇌어 본다. 아무런 의미를 담고 있지 않지만, 순서가 부여된 말. 그 순서에 필연적 이유는 없지만 모두가 그렇게 알고 있는 나름의 규칙이 정해진 말. 그러나 어떠한 의미도 전달하지 못한, 말이 되지 못한 말. 임봉호는 유사한 형태를 가진 단어의 변형을 통해 다른 의미를 만들어 내거나, 철자의 일부를 지우거나 덧붙여 전혀 다른 뜻을 만들어 의미의 대구를 이루는 문장을 재구성하는 등의 작업을 해왔다. 그 과정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며 언어에 담긴 사회적 약속의 견고함과 견고하지 않음 사이를 보여주었다. 이러한 작업의 연장선상에서 본다면 “가나다라마바사” 또한 견고한 사회적 약속이 때로는 말이 되지 못한 말,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할 수 있다.
1층의 영상작업 <낯선 오늘>은 광안리의 아침 풍경을 담고 있다. 멀리 광안대교에는 출근차량의 행렬이 이어지고, 화면 가까이로는 조깅을 하거나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는 사람들이 지나간다. 파도 소리와 반짝이는 햇살, 평화로운 풍경이다. 그러다 갑자기 이 평화로운 일상을 깨는 듯 한 경보음이 울린다. 코로나19 이후 우리에게 경각심을 알리기 위해, 또는 확진자의 정보를 알려주기 위해 수시로 울리는 경보음 소리에 풍경을 바라보던 우리의 시선과 생각은 잠시 멈춘다. 이어서 흘러나오는 코로나지침 메시지가 영어 음성으로 들려온다. 이는 세계보건기구의 코로나19 지침문을 읽는 인공지능 AI의 음성이다. 그리고 자막으로는 해석 불가능한 텍스트가 이어진다. 임봉호는 반복되는 경고음과 메시지 속에서 그 원래 목적인 경각심을 잃어가고 피로도만 쌓여 제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되는 경보시스템을 꼬집는다.
4층 1전시실은 그 자체로 작업이 된다. 작업명은 <코>. 기존의 오픈스페이스 배 공간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비어있는 공간 안에서 작품을 찾으려고 애쓸지 모른다. 그러나 이 공간 안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작품이라 할 만한 어떤 명확한 물체를 눈으로 확인할 수는 없다. 임봉호는 그래서 이 방 전체를 작품으로 삼고 작품명을 “코”로 붙였다. 코는 우리의 시지각 범위 안에 있지만 스스로가 자신의 코를 인식하지 않는 이상, 보이지 않고 무시된다고 한다. 기억 속 어느 장면에서도 시야 안에 있는 코는 존재하지 않는다. 보고 있지만 인지하지 못하는 대상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 이것은 잊혀져도 상관없는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은유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4층 2전시실에서는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 작업을 선보인다. 한쪽에는 액체가 든 수조 안에 핸드폰이 놓여 있고 화면 속에서는 물고기가 헤엄을 치고 있다. 그리고 다른 한쪽에는 모닥불이 피워져 있지만 나무는 타지 않고 있다. 젖지 않는 물과 타지 않는 불을 보여준다. 이 둘은 모두 모순관계에 있다. 임봉호는 우리가 과거 모순이라고 여겨왔던 현상의 공존이 가능해진 시대에 과연 모순의 개념은 어떻게 존재하는지, 또 다른 새로운 모순은 어떤 형태로 존재할지에 대한 의문을 자극한다. 작품명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는 1990년대 김광석의 노래에서 따온 것이다. 이 노래의 가사를 보면 모순적인 형용으로 가득하다. “물속으로 나는 비행기, 하늘로 나는 돛단배… 남자처럼 머리 깎은 여자, 여자처럼 머리 긴 남자.” 그러나 이것은 오늘날 더 이상 불가능한 모순적 이야기만은 아니다. 이렇듯, 시간의 흐름에 따라 모순이 모순이 아니게 되는 가운데 그 개념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지, 임봉호는 개념적 모순을 시각적으로 극복하여 제시하면서 질문을 던지고 있다.
4층 3전시실에는 80개의 숫자로 한 벽면이 가득 채워져 있다. 작품명은 <로봇이 아닙니다>. 임봉호는 2020년 1월부터 10월까지 자신을 인증하기 위해 받았던 인증번호들을 모았다. 온라인 세상에 접속하기 위해, 또는 비대면의 세계에서 자신이 임봉호임을 증명하기 위해 휴대폰을 통해 수많은 인증절차를 경험했다. 그 절차를 걸쳐 받은 일련의 숫자는 임봉호가 임봉호임을 증명해주었다. 이렇듯 우리는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가상의 숫자를 부여받고, 그것으로 온라인 비대면 세계와 접속한다. 그러나 임시적으로 나를 증명해주었던 이 번호는 그야말로 한순간에 증발해버린다.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프로그램에 의한 가상 번호의 조합일 뿐이다. 실체를 증명하기 위한 가상의 조합, 로봇이 아닌 인간임을 증명하기 위해 로봇의 방식을 따라야하는 이 시스템을 80개의 숫자로 보여준다.
코로나19가 가져온 낯선 오늘은 어쩌면 그동안의 익숙했던 것들의 질서가 꼭 그렇게 자연스럽거나 합리적인 것은 아니었을 수 있다는 깨달음을 주는 것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동시에 새로운 국면은 새로운 질서 또한 만들어 낸다. 사태나 상황에 대해 의문을 갖기 이전에 시스템 안에서 따라야 하는 규칙들이 생겨난다. 그리고 새로운 사회적 언어들이 만들어진다. ‘사회적 거리두기’, ‘2.5단계’, ‘언택트’, ‘자가 격리’ 등 코로나 시대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이해하기 어려운 어휘들일 것이다. 시스템과 언어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기에 새로운 질서와 어휘도 익숙해지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환경 가운데 여전히 낯설어야 하는 것에 대한 임봉호의 질문과 의미 찾기가 계속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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