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과 절망 사이, 반성과 의지 사이. <이슬비, 월간미술 기자>
욕망과 절망 사이, 반성과 의지 사이
이슬비 (월간미술 기자)
인간은 기호를 통해 투쟁한다. 기호는 복잡한 관계와 규칙 속에서 존재의 의미를 갖는데 이 과정에서 보이지 않는 권력관계가 형성된다. 기호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 곧 기존 권력에 대한 저항을 의미한다. 임봉호의 작업은 단순히 언어유희, 기호와 상징 놀이에 그치지 않는다. 주어진 상황을 견고한 틀로 받아들이지 않고 의도적으로 변형시킴으로써 탈주의 가능성을 엿본다. 그런 점에서 그의 작업은 정치적이다.
그의 대표작 <네 사전에는 없다>는 기존의 단어를 지우거나 채워 다른 단어로 치환시킴으로써 기록된 단어의 진실성을 밝히는 작업이다. 김민기의 ‘아침이슬’을 배경으로 화투패를 재배치해 815를 518로 뒤집어 읽는 <맹세의 맹점>은 핍박과 자유 사이에서 아직도 끝나지 않는 이야기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이처럼 작가는 언어를 비롯한 기호와 상징의 관계를 변주함으로써 권력을 숨기려는 전략과 이 전략을 통해 은밀하게 특권을 획득하려는 시도를 폭로하고자 한다. 우리는 여기에서 그의 작업이 가지는 전복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
기존의 작업이 현실과 기호의 관계를 변형시키는 방식이었다면 최근 작업은 기호의 새로운 조합에 집중한다. 또한, 추상적인 기호와 상징보다 작가 개인의 삶에 기반을 둔 구체적인 경험에 주목한 것이 특징적이다. 영상과 오브제가 병치된 작업 <콘크리트맛 솜사탕>에 유년시절 같은 동네에서 살았던 친구와 과거를 함께 회상하는 대화를 담았다. 이 작업은 단순히 옛 동네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며 재개발에 관한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는데 머무르지 않는다. 집은 단순히 거주공간이 아니라 삶 일부를 의미한다. 비탈진 언덕에 있었던 작가와 친구의 집은 허물어져 현재 그 자리는 아파트 지반공사를 위해 공중으로 사라져버렸다. 작가와 친구의 기억 속에 가물가물한 흔적으로만 남아있을 뿐이다. 작가가 아파트 공사장 옆에서 흙으로 만든 두꺼비집은 전래동요 “헌집 줄게 새집 다오”를 연상시킨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헌집 대신 새집은커녕 외지로 밀려나고, 보상받은 액수 차이로 이웃마저 잃어버린 재개발의 모순을 드러낸다.
이번에 선보이는 설치 작업은 사물의 조합을 통해 작가가 처한 현실을 담아냈다. 과거 그의 작업이 기호와 상징에 관한 오해를 줄이기 위해 다소 설명적이었던데 비해 관습적 상징성이 뚜렷하면서도 관객의 경험에 의한 다층적 해석이 가능한 사물들을 선택했다. <어디에 앉았나요?>는 가운데에 놓인 교자상 양쪽으로 목단병풍과 근조 화환이 마주 보도록 설치되어 있다. 교자상 위에는 작가의 학생건강기록부, 상장, 장학증서와 군대 수료증서 등이 놓여 있다. 부귀영화를 상징하는 목단병풍을 배경으로 교자상은 잔칫날 상차림을 연상시킨다. 반면 맞은편 근조 화환은 죽음에 대한 애도를 의미한다. 기쁨과 슬픔, 희망과 절망 사이에 교자상에 차려진 이 문서들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는 작가 개인의 역사를 보여주는 자료이자 사회적인 칭찬과 인정의 증거물이다. 칭찬과 인정은 한 개인의 성장을 위한 동기부여와 격려를 의미하지만, 훈육의 또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인간은 지속적으로 훈련과 육성을 통해 사회가 원하는 인간상으로 만들어진다. ‘참 잘했어요’ 도장, 칭찬 스티커, 다양한 상장과 증서 등은 학교가 원하는 학생, 사회가 바라는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장치에 해당한다. 다른 사람과 구별해 특별함을 인정받고 사회적 요구를 제대로 이행했음을 증명하는 사물들이다.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사회적 지배 양식으로서 교육 제도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의식을 제기했다. 그는 공평하고 균형 잡힌 교육을 제공하는 기관이라고 알려진 학교가 실상은 지배 질서의 기반을 공고히 하며 사회적 불평등 조성에 기여한다고 말한다. 학교가 지배계급이 승인하는 도덕과 규범을 강제적으로 주입한다면 이것은 상징적 폭력을 의미한다. 학생들의 성적을 등수나 등급으로 매기고, 능력과 열정이 있더라도 일류가 아니면 쉽게 낙오자로 만들어버리는 입시 위주의 사회, 성과 위주의 사회에서 상징적 폭력은 더욱 강력하다. 사회의 축소판인 가정에서도 아이는 인성보다는 성적을, 과정보다는 결과를 우선시하는 부모의 욕망을 내면화해야 착한 아이로 거듭날 수 있다. 엄격한 위계질서 속에서 일방적인 명령을 강요하는 군대와 같은 집단은 오죽하랴.
설령 한 가정의 왕자님, 공주님으로 태어나 칭찬받으며 성장하고 사회가 만들어 놓은 목표를 모범적으로 달성했다 하더라도 미래의 행복한 삶이 보장된 것은 아니다. 2016년 상반기 청년 평균 실업률은 10.6%을 기록했다. 구직난이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유학을 갔다 오면 어디든 취업이 보장되던 것도 옛말이 되어버렸다. 이제는 유학률 마저 감소하는 실정이다. 과거 돌상차림 앞에서는 희망이 가득했지만 오늘날 청년들에게는 막다른 길이 기다리고 있다. 한국 경제는 더 이상 예전과 같은 고도성장을 이루기 어렵고 일자리 수도 점점 줄어들고 있다. 대학은 이미 경쟁과 수치적 목표를 최우선으로 삼는 취업 준비장으로 전락해버렸다.
몇 년 전 청년들이 88만원 세대로 규정되었다면 최근에는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하는 ‘삼포 세대’, 인간관계와 내 집 마련까지 포기하는 ‘오포 세대’, 심지어 ‘N포 세대’라는 용어가 등장했다. 한국 사회는 ‘헬조선’이라고 불리며, 미래에 대한 희망 없이 무한경쟁에 내몰린 동시대 청년들의 좌절감은 심각하다. 근조 화환은 작가를 포함한 오늘날 청년들의 자의식을 의미하며 이것에 대한 애도의 표현일 것이다.
그렇다면 젊은이들은 이 땅에서 어떠한 희망도 품을 수 없는 것인가? 다시 임봉호의 작업으로 돌아가보자. 근조 화환과 목단병풍을 배경으로 교자상 앞에는 방석이 각 각 놓여 있다. 잔칫상의 주인공이라면 정작 맞은편의 근조 화환이 보일 것이다. 반면 근조 화환의 주인공에게는 눈앞에 목단병풍이 보일 것이다. 이 병풍은 과거의 낙관만을 상징할 것인가? 지금 어느 자리에 위치한다 하더라도 삶은 한쪽 면만 보여주지 않는다. 또한, 한 사회 속에서 개인과 개인의 관계는 일방통행이 아니라 상호 작용 속에서 형성된다. 다른 이의 희생을 전제로 한 승자독식 사회가 아니라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며 더불어 행복한 사회를 함께 만들 수는 없을까?
예술가는 자신만의 단어장이 있듯이 각자의 방식으로 이 세상을 해석하는 통로를 제공한다. 임봉호의 작업은 지금의 현실이 견고하게 닫힌 상태로 여겨진다 하더라도 의지가 있다면, 더욱이 혼자가 아니라 함께 변화를 꿈꾼다면 언제든지 수정 가능한 열린 구조라는 사실을 시사한다. 왜곡된 역사 역시 마찬가지다. 여기 젊은 한 예술가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부귀영화를 꿈꾼다. 예술가로서 꿈꾸는 부귀영화란 1%의 스타 작가가 되는 것이 아니다. 99%에 속할지라도 서로 다른 가치를 상상하고 실험하며 옆 사람과 함께 예술을 향유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 예술은 단순히 발화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실천으로 이행되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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