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신과 불확실성의 시대, 무엇을 믿고, 어떻게 스스로를 지킬 것인가 <이수정,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불신과 불확실성의 시대, 무엇을 믿고, 어떻게 스스로를 지킬 것인가.
이수정(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의사소통에서 음성언어와 같은 언어적 내용만큼 중요한 것은 표정이나 손짓 같은 비언어적 형식이다. 예를 들어, 친절한 어조로 웃음을 띄며 욕을 하거나, 반대로 화난 표정으로 친절한 말을 건넬 때, 듣는 사람은 말의 내용보다 표정이나 어투에 더 많이 영향을 받는다고 한다. 뉴스에서도 내용이 충분한 조사와 객관적 자료에 기반하였는가 하는 사실만큼, 사람들이 ‘객관적’이라고 믿는 형식을 갖출 때, 사람들은 내용을 쉽게 믿는다. 언론이 실업률이나 집값상승률 등 자극적인 내용을 다룰 때, 자주 등장하는 통계나 수치 역시 어떻게 읽고, 어떤 관점에서 분석하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 더 극단적으로 뉴스의 형식을 갖춘 가짜뉴스를 만들어 내기도 점점 더 쉬워지고 있다. 믿을 수 없는 정보들로 가득한 시대, 우리는 무엇을 믿을 수 있고, 믿어야 할까? 임봉호의 영상과 설치 작업들은 이러한 불신과 불확실성의 시대에 우리가 정보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당신이 믿고 있는 것은 믿을 만한 것인가.
‘제공된 정보’를 받아들이는 것에 익숙한 사람들은 눈 앞의 미술 작품을 자신의 눈으로 보고, 자신의 시각으로 해석하려고 하기보다 도슨트가 제공하는 친절한 정보를 그대로 믿고 수용한다. 뉴스와 달리, 미술관의 설명은 상대적으로 ‘권위’를 갖고, 사람들에게 ‘낯설고 어려운 현대미술’을 이해할 수 있는 정보, 즉 신뢰할 수 있는 정보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작품의 의미는 사실상 정답처럼 정해진 것도 아니며, 각 관객들의 경험과 정보에 따라 구성될 수 있는데, 대개의 경우 주어진 정답처럼 보이는 내용을 수용하는 경우가 빈번히 발생한다. 간주관적으로 의미가 생성되는 예술작품의 경우와 달리, 정치사회나 경제의 현안들에 대한 뉴스는 상대적으로 ‘객관성’을 유지할 것으로 기대하고 또 요구 받는다. 최소한 의도적인 조작이나 왜곡은 지양할 것이라고 믿고, 또 기대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 작은 변화만으로도 단어는 전혀 다른 의미와 뉘앙스를 갖게 되는데도 우리는 그 작지만 큰 변화를 가져올 차이에 대해 둔감하다. 임봉호의 <Not in your dictionary> 연작(2014)은 자주 사용하는 어휘에서 특정 부분을 지우거나 더해서 전혀 다른 단어를 만들어낸 작업이다. 속된 말로 ‘한 끗 차이’로 전혀 다른 단어와 의미가 생성된다. 석사를 적자로 바꾸고, 본질을 돈질로 바꾸고, 수면을 술병으로 바꾼 후, 그 내용을 연결하면 “석사를 마치니 통장 잔고는 적자, 본질은 멀어지고 돈질만 남으니, 수면도 부족하고 술병도 쌓인다”가 된다. 또 이윤을 이유로 바꾸고, 정치를 정지로, 도덕을 도적으로 바꾸면 “이윤이 이유가 되는 지금, 정치는 정지되고, 도덕은 멀어지며 도적이 들끓는다.”가 된다. 선 하나 그었을 뿐이고, 선 하나 그려 넣었을 뿐인데 선과 악, 정과 반을 오간다. 이 언어들은 믿기에는 너무나 취약하고 부박한 것들이다.
믿었던 사실이 오작동할 때
<Not in your dictionary> 연작이 단어의 변화를 통한 의미의 급진적 변화를 위트 있게 보여준다면, 영상 작품 <어떤 애국심>은 관람자를 불편하게 만든다. 태극기의 4괘가 지워지고, 태극의 푸른색이 붉은 색으로 뒤덮인 자리에 남은 것은, 바로 일장기이다. 몇 가지 요소를 건드린 것만으로 태극기가 사라지고, 한국인들이 태극기만큼이나 익숙하면서도 불편하게 생각하는 일장기가 남는다. 믿음의 대상은, 실상 믿을 것이 아니거나 변질되기도 한다. <사회교실1>은 가장 신뢰할 만한 내용들로 구성되었다고 간주되는 교육용 교재의 허상과 위험을 폭로한다. 교과서를 만들고, 오랜 시간 동안 교육용 교재를 만들어온 모 출판사에서 나온 어린이용 학습서의 내용 중 작가가 보기에 잘못되었거나 논란의 여지가 있는 부분들을 찾아냈다. 세상이 바뀌고 가치관도 변화하기 때문에 특정한 주장이나 관점을 아이들에게 교육하기란 어렵다. 여러 가지 관점이 가능하며, 각자 논리적으로 관점을 갖도록 교육하기 보다는 하나의 ‘정답’을 정해놓고 교육하는 우리의 교실을 떠올려볼 때, 작가의 도발적인 문제제기는, 정답을 강요받아왔지만 그 정답이 작동하지 않는 사회를 살아가는 지금의 젊은 세대들이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다. 교과서와 학교에서의 학습한 내용과 극단적으로 괴리된 사회, 학습된 가치관이 작동하지 않는 사회에서의 당혹감은 임봉호의 다른 작품에서도 감지된다. <어디에 앉았나요?>(2016)에서 한쪽에는 상장, 학위증, 트로피 등 사회에서 성취나 우수성에 대한 보상으로 제시되는 것과 풍요와 부를 상징하는 모란 병풍이 펼쳐져 있고, 다른 편에는 근조화환이 놓여 있다. 성실한 학생으로 인정받거나, 부모님의 자랑스러운 자식이 되거나, 사회의 중요한 인재가 ‘되는’ 것 혹은 그렇다고 ‘평가받는’ 것이 동일시되지만, 일정 순간에 이르면 둘 중 하나가 혹은 둘 모두가 무의미해진다. 사회적 보상과 인정을 갈구하지만 그런 것들이 우리가 직면하는 많은 문제들을 해결해주지 못하며, 경우에 따라 우리가 처한 문제를 은폐하거나 치장한다는 것을, 어른이 되면서, 우리는 알아버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 것인가.
믿을 수 없는 정보들에 둘러쌓여 살아간다는 사실을 알아버린 어른으로, 또 사회가 요구하는 상에 스스로를 맞춰가면서 살아가는 삶을 불편하게 느끼기 시작한 어른으로, 앞으로의 날들을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부ㄷㅎ다>(2018)은 우리의 삶이 불편부당함과 모호함, 찬사와 비판, 그 모든 것이 뒤엉킨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자 이번 생을 ‘살아낼 수 밖에’ 없음을 말하는 듯하다. 무대 위에 선 관객 주위에서 박수를 보내는 것같지만, 실체를 볼 수 없는 거대한 손짓과 울려퍼지는 소리는 편안하고 유쾌하게 다가오지만은 않는다. 박수갈채를 받는 순간, 주목받는 순간을 경계해야하고, 그 때부터 위험이 닥치기도 하고, 비난과 트집이 시작되기도 한다. 임봉호의 작품은 정답과 객관적 사실, 사회적 승인과 인정으로 구성된 세상이 점차 흐려지고 무너지고 뒤집어지는 과정을 노출하며, 이는 일종의 성장소설이자 잔혹동화와 같다. 가짜뉴스와 거짓말, 기만과 허무함으로 때로 무력해지더라도, 면역력을 키우며, 스스로를 지켜가면서 살아가야하는 우리들의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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